1.화폐란?
물건을 사고팔때 물건 값으로 주고받는 종이나 쇠붙이로 만든 돈
조선시대의 화폐
우리나라 최초의 종이돈인 저화와 세종때의 조선통보가 있었지만 많이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상업이 활발해지면서 상평통보가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조선말기 경복궁을 다시 만들기 위해 당백전이 만들어 졌습니다.
2천년전 中동전 '貨泉'… 光州에서 무더기 출토
"중국과 직접 해상교역한 증거"
광주 복룡동 무덤에서 출토된 화천 꾸러미. 아래 사진은 동전 세부 모습.
광주광역시 복룡동의 1세기 전반 무덤에서 2000년 전 중국 동전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재단법인 동북아지석묘연구소(소장 이영문)는 "광주 복룡동 도로 확장 공사 구간을 발굴 조사한 결과 초기 철기 시대(마한) 무덤에서 중국 왕망(王莽)이 세운 신나라(新·8~23년) 때 동전인 '화천(貨泉)' 50여점이 꾸러미로 출토됐다"고 18일 밝혔다. 화천이 우리나라 무덤에서 나온 것도, 꾸러미로 출토된 것도 처음이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화천은 총 19점뿐인 데다 주로 조개더미 등에서 1~2점 소량으로 출토됐다.
화천 꾸러미는 긴 네모꼴의 1호 토광묘(움무덤) 안에서 짧은목항아리(短頸壺) 1점, 청색 유리옥 78점과 함께 발견됐다. 화천은 기원후 14년에 처음으로 주조돼 후한 광무제가 '오수전(五銖錢)'으로 화폐를 통합한 기원후 40년까지 26년간 쓰인 화폐다. 주조 연대가 확실하고 단기간에 통용돼 유적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화천은 한반도에서 영산강 유역과 남해안, 제주 등 한정된 지역에서만 출토됐다. 연구소는 "복룡동의 초기 철기 무덤에서 화천 꾸러미가 나왔다는 건 당시 중국과 직접 교역했던 마한의 정치 집단이 남해안과 영산강의 해상 교역로를 따라 형성됐다는 증거"라고 했다.
성공으로 가는 위대한 비밀의 규칙은 없다. 성실하고 약속을 잘 지키고 허세를 부리지 않고 친절을 베푸는 것과 같은 작은 비밀이 있을 뿐이다.
- 돈의 속성 -
거두절미, 필독서. 두 번 말할 필요 없이 아마 아시는 분은 다 아실 법한 '생각의 비밀'을 비롯한 여러 명저를 쓰신 김승호 회 장님의 최신간이다. 신간 예고 소식을 접하고 바로 예약판매 주문을 넣어 단숨에 읽어 내렸다. 일산에서 분당을 오고가는 시간 경인전철선 안에서, 여유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 채 손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몇 시 간이 훌쩍. 예상했던 이야기와 그렇지 않았던, 그랬기에 더 여러 생각을 남기게 만드는 '진짜 부자' 님의 돈 관련된 이야기들. 뭐 하나 버릴 것이 없어서 필사하는 페이지만 수두룩...
시중엔 부자가 아닌 사람들의 부자 책(?) 들이 참 많다. 조금 성공하거나 소위 난다 긴다 좀 알아준다 하는 '인플루언서' 혹은 '인싸' 정도의 인맥으로 '허세'를 부리 는 이들도 손쉽게 SNS에서 볼 수 있다. 뭐 해서 돈 벌고 뭐 해서 돈 모으고 뭐 해서 부자가 되는 중이고 본 인 사업 남 사업 이야기 참 잘도 많이 하고 겸손을 빙자한 자랑 인증샷도 대다수. 뭐 남일이 어찌 되었든 그런 행위가 나쁜 것은 아니다만 나쁠 때에는 분위기를 '조장' 하려는 '저의'가 있을 때일지도 모른다.
아무 렴. 게다가 젊은 시절 쉽게 얻은 부를 가지고 정말 부자인 것처럼 의 이야기는 별로 마음에 와 닿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유튜브 영상이나 시중의 여러 스낵 콘텐츠들에 눈과 귀를 닫아 버리곤 한다... 그래서인지 경 영 경제 자기 계발서는 외서를 먼저 보는 편이다... 물론 나 또한 그런 졸작의 작가 중 한 명이라는 걸 겸허 히 수용하면서.
최소한 김승호 회장님이 말씀하시는 '부자의 기준'에 걸맞은 사람은 아직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부부는 부채 없는 내 집 마련을 일찍 해냈다... 힘들었다. 쉽지 않은 레이스였지만 정말 열심히 살았 던 것 같다. 레버리지 한답시고(?) 섣불리 '갭 투자' 나 '주식투자'를 영끌대출 해서 하지 '않기로' 했었고 이 것이 결혼 전후 신혼초의 '부의 증식'의 첫 번째 스텝이었고 굳은 기준이었다. 남들이 뭐라 하든 말든 투자 가 느리다고 바보라 하든 말든 그건 남의 목소리지 우리 부부의 목소리가 아니었으니 상관없었다. 오롯이 그것을 위해 무자녀 기혼 시절엔 줄기차게 달렸다. 뭐 이런 강고집 태도는 여전하다.. 작은 돈일수록 함부로 하지 않는 거다
부부 연평균 소득이 1억을 넘기는 순간부터 사실 더욱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불리고 아끼며 살았다... 약간 있는 사람(?) 들과 비교하자면 역주행(?)이랄까... 타인과 비교 욕망에 허위 허세 가득한, 경박스럽고 우아하지 못한 속 빈 졸부가 되고 싶진 않았으니까. 아울러 누차 강조하지만 소득은 재산이 아니라고 생각 매거진의 이전글 누구는 죽고 죽인 자들은 살고 한다. 소득은 자산이 아니다. 제대로 된 소비와 저축 관리 없이는 절대 자산으로 이뤄내지 못한다. 많이 벌 어도 헛 나간다. 그렇게 한 바가지에서 새는 그릇이 다른 곳에서 새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부채 또한 재산이 아니라 그저 남의 돈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이 생각은 유효하다. 물론 '이용' 할 수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빚'의 성질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빚은 빚이다. 남의 돈이다. 내 돈 이 아니라는 소리다. 내 돈 처럼 잠시 사용할 뿐 언젠가 돌려줘야 하는 '빚' 인 것이다. 그렇게 부채로 떠 받 드는 '부'를 가진 사람들이 (소위 투기성 갭 투자자라고 거칠게 표현하자면 그들은 부자가 아니다. 세입자 불안하게 하고 돌려 막기 하기 쉬운 하우스 푸어겠지.. )
내 기준에서는 전혀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금 보유력이 많고 자산 증식력이 강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빚이 대부분인 집부자(?)들은 진짜 내성 강 한 부자가 아닌 셈이다. 위기엔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다. 요즘처럼 (617 부동산 규제정책이 나왔다. 정부 가 제대로 칼을 뽑은 듯싶다) 여하튼 오래, 천천히 꾸준히 불려서, 그것도 오래 지키지 못한 채 단기간의 부를 반짝 이룬 사람도 내 기준에서는 부자가 아니다...
이런 생각이기에... 나는 배우자와 지속 재무 대화를 나누며 재산이 늘어날수록 협의를 하며 관리를 한다. 여전히 가계부를 쓴다. 한 달 정산할 때 더 아낄 수 있는 건 아끼고 대신 좋은 소비를 하려고 애쓴다... 물 욕이 점점 없어지다 보니 별로 쓰는 것도 없는 요즘이다. 한정적이고... 고작 해봤자 4인 가족 외식과 부모 님 보은 용돈비, 책 소비와 기타 고정 집 관련 관리비 정도다. 고마운 배우자를 만났기에 감사하며 산다. 그러나 회장님이 말씀하시는 부자의 기준엔 우리 집은 여전히 반한다. 우리 집 소득 출처의 대부분 근로소 득이었고 여전히 근로소득이 상당수 차지하기에. 비근로 소득을 만들긴 했지만 책에 언급된 월평균에는 아직 다가가지 못한다. 열심히 노력 중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부자의 기준은 다음 세 가지다. 1. 융자가 없는 본인 소유의 집이고 2. 한국 가구 월평균 소득 541만 1,583원을 넘는 비근로 소득이다. 강남에 수십억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고 억대 연봉자라도 융자가 있고 본인이 일을 해서 버는 수입이 전부 라면 부자라 말할 수 없다. 어떤 경제적 문제가 발생하거나 신체적 상해가 생겨도 살고 있는 집이 있고 평 균 소득 이상의 수입이 보장된 사람이 부자다.
500만 원 이상의 비근로 소득이 있으려면 20억 원이 넘는 자산이 부동산이나 금융자산에 투자되어 있어야 한다. 3. 더 이상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욕망 억제능력 소유자다. 세 번째 조건을 충족하려면 한 인간이 자기 삶 의 주체적 주인이 되어야 한다. 부는 상대적 비교다. 50억 원을 가졌든 100억 원을 가졌든 스스로를 상대 비교하면 여전히 부자가 아니라 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이다. 100억 원을 가졌어도 200억 가진 사람 앞에 서면 초라하고, 1 ,000억 원을 가 진 사람에게 비굴해질 수 있다.
느리게 꾸준히 천천히 그렇게 튼튼히 만드는 것 그러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
다행히도 현재 가족 구성원 중 성인 구성원인 우리 부부는 욕망 억제 능력이 '상당' 하다. 이게 어쩌면 현재 우리 집을 '부자'로 만들어 주는 강력한 무기(?)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누군가 보기에 없어 보일(?) 수 있지만 그건 남의 시선이니 아랑곳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하면 그만 이니까. 아울러 누구나 자기만의 부의 기준이 있을 테니까. 감사하게도 우리는 둘 다 그 흔한 소비재 (커피 나 화장품 등)에 별 욕심이 없다. 정말 관심이 없다... 있다면 그 소비재의 '상장주' 겠다만...
결국 회장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 조건 중 딱 하나가 여전히 부족하니.... (비근로 소득의 충족) 그 하나를 채우기 위한 과정을 여전히 진행 중이다. 투자를 실천하고 꾸준히 돈을 모으고 아끼고 굴리고, 미래의 사업을 생각한다. 말미엔 부부의 노후와 좋은 죽음을 생각한다.
겸손 절제 그리고 참선말미에 남은 세 가지 키워드를 마음에 담았다 나에게 부자의 기준은 이 세가지가 확실한 부자 다 책갈피를 한껏 해 두었다. 차마 포스팅으로 남기지 못할 정도의 양이라; 그만큼 좋은 내용들이 한가득이다. 무릇 큰 실패를 해 보았고 그것을 디디어 더 큰 성공을 거두고 생각마 저 이런 겸허함과 세상만사 온 진리와 철학, 영성까지 꿰차고 계신 이 분의 메시지는 그야말로 진짜 부자 가 말해주는 '돈' 이야기인 것은 분명하다. 다른 허튼 부자에 대한 영상 혹은 책보다도 이 책 몇 번 재독 하 면 그걸로 재테크 기본 마인드뿐 아니라 부를 다루는 철학까지도. 모두 섭렵할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 일 수도 있지만, 제 스스로도 다시 한 번 정리하며 다짐하고, 소수의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내가 생각하는 돈” 에 대해서 포스팅합니다.
돈 이야기
현 시대와 트렌드는 자유롭고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늘었고 또 그런사람을 좋아하죠. 저는 김승호 회장의 강연에서 “왠만한 고민은 다 돈 에서부터 나온다. 사실 그런 고민과 어려운 일들은 돈이 있으면 다 해결된다.”라는 말이 공감되고 기억에 남는데요. 저도 돌이켜보면, 그랬습니다. 있으면 너무 편리한 게 돈이죠. 그리고 그 분의 강연과 책에서, 그런 돈을 인격체 다루듯이 대하고 관리해야한다고 말하는데요.
이제는 저의 돈 이야기가 돈돈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내 것(내돈)을 잘 벌고 잘 쓰고 잘 지키고 잘 불리기 위해서 고민하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나는 돈을 잘 벌고 싶다.
누구나 돈을 잘 벌고 싶죠. 누구에겐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꿈이겠죠.
저도 블로그를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수익화” 이니까요.
그럼 막연히 돈을 잘 벌고 싶다. 부자가 되고 싶다. 생각하고
1. 나는 왜 돈을 잘 벌고 싶은데?
2. 얼만큼 벌고 싶은데? (향후 언제까지 얼마큼의 자산을 갖고싶은지?)
3. 그래서 어떻게 벌껀데? (그 자산을 어떤방법으로 만들 것인지?)
4. 알아보고 실천해봤어? (만드는 과정을 찾아보고 배우면서 실행하고 계신가요?)
저도 누구나 생각하듯이, 막연한 생각만 가졌는데요. 올해 처음으로 생각의 물꼬를 트다보니,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시작했어요.
자아성찰과 자기객관화의 시간을 많이 마주했어요. (계속 진행 중!)
이렇게 글을 쓰지만,현재 저도 평상시와 같이 어떤 변화도 없고 많이 부족해요.
하지만 앞으로 성장할 제가 보이고 그렇게 믿습니다. 또 감사하게 배움과 깨달음의 기쁨도 생겼습니다.
돈의 4가지 속성-돈의 4가지 과정
간단하게 돈의 흐름을 보면,
돈벌기 - 돈쓰기 - 돈모으기 - 돈불리기
사실 이렇게만 보면 간단하죠.
잘 벌어서 잘 쓰고 잘 모아서 모은돈으로 잘 투자하면 부자가 되는데.
주식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면 된다. 라는 말이 전 같게 들리더라구요.
여기서 싸게 사는 법= 여기서 “잘” 이 같은 말 같아요.
그래서 그 “잘” 하기 위해 다들 무언갈 하고 공부하고 시도하죠.
블로그를 하면서 “경제.비즈니스” 라는 주제 속에 모든 분야: 예적금, 절약, 보험, 대출, 투잡, 엔잡, 부동산, 주식, 채권, 경매 등이 이 4가지 안에 다 들어있더라구요.
근데 이렇게 많은 분야를 다 잘 하고 싶지만, 나의 지식, 가용 가능한 시간, 가용 가능한 돈 등으로 다 잘 할 수는 없죠.
이때 바로 필요한 건 나의 현 상황을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그 다음 내게 적합한(필요한) 단계가 무엇인지, 뭐 부터 할건지 하나씩 지워나가면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죠.
4가지과정을 적용해보면
먼저 위 4가지 과정을 적용해 예를 들어볼께요.
돈벌기 영역에서 매달 외벌이 절대소득과 월세소득이 있음. 000만원. 그 외 소득없음.
돈쓰기 영역에서 가계부를 쓰다보면 파악되는 매달 고정지출과 변동지출 또 나의 소비패턴.매달 “수입-지출(소비)= ?” 을 파악 -> 소비를 계획하고 어느정도 조절가능해진다.
돈 모으기 영역에서 먼저 1년 돈모으기 목표를 세운다. 나는 올해 2000만원 모으기가 목표. 그럼 한달에 약166.6만원 씩 저축해야한다. 하지만 매달 저축가능한 돈이 있다. 그러려면 월 얼마를 벌어야 하는지 스스로 알 것이다.
돈 불리기 영역에서 먼저 나는 투자할 시드가 있는지? 시드의 기준은 본인이 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투자현황 및 자산을 파악한다. 나는 현재 1주택소유자이고 월세소득이 있으며, 다른형태의 부동산도 투자한 상황. 부동산 외의 투자는 없음. 저축보험과 예적금 등에 돈이 묶여있고 투자시드가 현재없음. 투자할 상황이 아니라 판단.
소액부터 투자할 수 있지만, 투자활동을 하기전 발품을 팔아야하는 데 (시간이 들어간다.)
나는 가용할 시간에 정석대로 더 버는 것으로 우선 순위를 정했다. 더 벌고 아껴 다시 시드부터모으기로 말이다. 이렇게 우선순위를 정해야한다.
누군가는 조금씩 이 4가지 활동을 다 할 수도 있고 반대로 소액으로 돈 불리기 투자를 시작해 돈을 벌 수 있지만, 내게 주어진 능력과 속도를 보았을때 더 벌기로 결정했다.
그럼 앞으로 나는?(계획세우기)
더 벌기로 결정한 나.
그래서 어떻게 벌건데? 말은 쉽지만 어려운 일이다. 계속 고민해왔고 진행중인, 또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현재 블로그를 꾸준히 하고 있고 블로그를 올해의 원씽으로 가져가려했지만, 솔직히 인풋에 비해 아웃풋이 적은 블로그. 블로그는 숨쉬듯이 운영하되 투자활동을 안하는 대신, 새로운 것을 배워보기로 결정했다. 수익화 할 수 있고 업이 될 수도 있는 일들을 여기저기 찾아보면 정말 많다. 몸과 시간이 한정되 있어서 못할뿐. 그 중 하고 싶고 나의 상황과 능력 등에 적절한 것을 결정한다. 다 할 순 없으니, 한가지를 선택하여 먼저 해보기로 결정했다. 이제부터 배우고 습득한 후, 내 실행력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꾸준히 현재의 나와 내가 원하는 내 인생의 모습을 객관화하면서 닿을 수 있도록 구체화하고 실천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
한 푼을 우습게 아는 사람은 한 푼 때문에 운다
돈 번 자랑 말고 쓴 자랑 하랬다
돈 지고 저승 가는 사람 없다
재물을 모으기보다 지키기가 어렵다
돈과 욕심을 늘수록 커진다
돈에 대한 속담은 끝이 없다. 인류가 돈을 만들어 쓰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 모든 답을 주는 곳이 대전에 있다. 한국조폐공사가 운영하는 화폐박물관이 그곳이다.
▲ 화폐박물관 전경
▲ "돈은 언제 처음 사용되었을까?"가 설명되어 있다.
대전광역시 유성구 과학로 80-67(가정동)에 있는 화폐박물관(1988년 설립)을 찾은 것은 어제 오후로 그 시각 대전의 날씨는 불가마 그 자체였다. 한 발자국을 옮길 수 없을 정도로 푹푹 찌는 날씨였지만 방학을 맞아 부모님과 화폐박물관을 찾은 어린이들이 제법 많았다.
화폐박물관은 크게 동전(주화)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주화역사관이 1층에 있고 2층에는 종이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지폐역사관으로 나뉘어 전시 되어 있다.
우리나라 동전의 역사는 고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조선시대의 자모전, 삼한시대에는 동전, 금, 은을 소재로 한 무문전과 철을 이용한 칭량화폐(稱量貨幣) 따위 기록이 있으나 현재 철을 이용한 유물 외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 서로 다른 동서양의 고대 주화
▲ 칼로 만든 화폐 "도전"의 종류
▲ 우리나라 최초의 주화 동국중보(東國重寶)-오른쪽 두번째, 주화 이름 앞에 東國ㆍ海東ㆍ三韓은 우리나라를 이르는 별명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동전(주화)은 996년(성종 15년)의 철전(鐵錢)으로 형태가 둥글고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꿇려 꿰미에 묶어 창고에 쌓아두었다가 길일을 택해 발행하였다. 그러나 농경생활이 근간이던 고려시대에는 동전 사용이 정착되지 못하고 대부분 물물교환이 주종을 이뤘다. 이후 1097년(숙종 2년) 대각국사 의천이 동전 사용을 주장하여 주전관을 설치하고 1101년 은병(銀甁)을 최초로 발행하였다. 이것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유통되었다.
한편, 종이돈(지폐)의 최초 화폐는 1402년(태종2년)에 발행한 저화(楮貨)였으나 액면가치가 커서 소액거래 시에 불편이 따르므로 동전인 조선통보를 만들어 함께 유통시켰다. 조선 후기인 숙종 4년(1678년)에 이르면 상평통보를 발행하게 되는데 이 돈은 전국적인 단위로 사용되었으며 고종말까지 200년간 쓰였다.
그러나 1876년 개항이후 외국과의 무역 시에 상평통보는 운반 등 여러 가지 불편함이 따랐다. 당시 중국과 일본, 러시아, 멕시코 등에서는 은화를 사용하였으나 상평통보는 동으로 만들어 화폐가치의 차이에 따른 불편이 많은 관계로 고종 24년(1887년)에 최초의 상설조폐기관인 경성전환국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후 1905년에 우리나라는 세계주요국가들 처럼 금본위제도를 채택하여 사상 처음으로 금화를 발행하였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이 발행한 동전(주화)을 사용하다가 1950년에 한국은행의 설립으로 한국은행권이 나오는데 이때는 미국 필라델피아 조폐국에서 십환, 오십환, 백환화를 제조하였다. 완전한 우리 기술로 동전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은 1966년부터로 이해에 원, 오원, 십원짜리를 만들었고 1970년에는 백원, 1972년에는 오십원, 1982년에는 오백원자리가 선보이게 되었다. 지금 무심히 쓰는 동전의 역사도 돌아보면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 고종23년(1886) 독일에서 수입되었던 주화를 찍는 '압인기"
▲ 남아있는 자료가 있고 지폐다운 지초의 지폐 <호조 통화태환권>, 최초의 일본제일은행권, 최초의 한국은행권(1950년 7월)- 위로부터
▲ 한글로된 최초의 한국은행권(1962년 6월)
한편, 종이돈의 역사 또한 파란만장하다. 조선시대 유통되던 저화(楮貨)는 현재 남아 있는 자료가 없고 지폐다운 모양을 갖춘 것은 1891년 제조된 호조 통화태환권을 들 수 있다. 이후 1902년 일본 제일은행권, 구 한국은행권, 조선은행권이 차례로 선보였다. 종이돈(지폐)역시 동전(주화)처럼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으며 광복 후 1950년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 반세기 만에야 제대로 된 종이돈을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화폐박물관에는 주화(1전시관)와 지폐(2전시관)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전시해놓았으며 위조방지홍보관(3전시관)에는 날로 정교해져가는 은행권과 유가증권의 위 ,변조 사례와 이에 대응한 한국조폐공사의 위조방지 연구 현황을 비롯하여 다른 나라의 화폐속에 숨은 위조방지 요소 등을 일반인이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위,변조 식별능력 등을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 전시장 모습
▲ 엄마와 아이들이 전시품 관람에 여념이 없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2전시실(지폐전시실) 안쪽에 설치해놓은 지폐제조 과정에 표시된 용어의 어려움이었다. 특히 초지공정의 경우, 권취, 광택, 조습, 후건조, 열풍건조, 싸이징 같은 용어가 별다른 설명 없이 제시되고 있었는데 일반 관람객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이날 기자가 들른 시각에도 초등학생 들이 많이 박물관을 찾고 있었는데 화폐박물관 측에서 관람객의 연령대를 제대로 파악하여 어려운 부분에는 좀 더 쉬운 설명을 곁들여야 할 것으로 보였인다.
"박물관이 너무 덥네요, 어떤 설명은 어린이는 커녕 어른인 제가 읽어봐도 어려운 곳이 많네요." 이 말은 방학을 맞아 초등학교 2학년인 딸과 함께 박물관을 찾은 이수자(42살, 도마동 거주) 씨가 한 말이다. 사실 2층 지폐전시실의 경우 낡은 에어컨 한 대뿐이라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무더웠다. 박물관 담당자들은 섭씨 35도 안팎의 날씨에 전시실을 둘러보고 관람객들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 지폐 용지를 만드는 기계 "초지기" 모형(1/20로 줄임), 온통 일본 용어로 쓰여 있어 관람객들이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화폐박물관에 들어서면 바로 볼 수 있도록 마련한 유리전시장 위치다. 이 유리전시장 속에 전시하고 있는 윤봉길, 한용운, 류성룡의 기념주화를 찍었더니 천정에 달려 있는 형광등에 얼비쳐서 제대로 된 촬영을 할 수 없었다. 그뿐이 아니라 전시장 곳곳의 조명이 한쪽으로만 빛이 강하게 비치도록 하여 관람하기가 무척 거북스러운 곳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조폐공사 정문을 지나 화폐박물관으로 들어가는 도로 역시 매우 좁고 외졌던 것고 문제였다. 기왕이면 조폐공사 담장을 1미터만 안쪽으로 들여놓았더라면 화폐박물관을 찾는 이들에게 안전한 접근성을 보장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런 지적은 박물관 관리자들이 일반 관람객이 되어 접근해보면 바로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본다.
상속을 받거나 복권에 당첨되거나 사업에 성공하는 것 사업에 성공하는 방법은 두 가지 직접 창업한다 👍
1. 직접 창업한다. 🌱
2. 남의 성공에 올라탄다. (주식) 💪
열심히 산다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다 돈을 많이 번다고 부자가 되지도 못한다 부자가 된다고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부는 삶의 목적이 아니라 도구다.
빨리 부자가 되려면 빨리 부자가 되려 하면 안 된다. 빨리 부자가 되려는 욕심이 생기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다. 사기를 당하기 쉽고 이익이 많이 나오는 것에 쉽게 현혹되며 마음이 급해 리스크를 살피지 않고 감정에 따라 투자를 하게 된다. 거의 모든 결말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혹시 운이 좋아 크게 성공을 했어도 다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모든 조건을 가진 자산 과 인연만 만들게 된다. 무리한 투자나 많은 레버리지를 사용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힘이 약한 재산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책 안에만 갇히지 않고 그걸 현실로 이끌어 내는 이들이 결국 진정한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도, 이 최상위 부자가 말해 주신 돈에 대한 모든 것을 마음에 담아 두고 하루를 지낸다. 현재 할 수 있는 내게 주어진 환경과 시간 안에서, 일상이라는 24시간을 소박하게 지켜내며, 타인의 욕망에 세 상의 예측 불허한 흐름에도, 휘둘리지 않고 천천히 간다.
인생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일 뿐 남에게 인생 맡기면 쪽박차기 쉽다 리딩방 신문 기사를 보았다 안타깝다 점점 사기가 많아지는 시대다
천천히 얻은 부와 오래 무너지지 않는 '부' 야 말로 진정한 '재산'이고 '자산'이라 믿기에. 현재의 '부'에서 20년 후의 '부'를 기대해본다. 그리고 우리 부부의 좋은 죽음을 간절히 기원한다. 말미에 눈을 감기 전에 호상이며, 원하는 경제적 자유를 되도록 이뤄냈고 아이들이 그 '습관'을 그대로 받고 자신 의 것으로 주인으로 살 수 있기를. 어쩌면 가장 큰 부자들은, 자녀들에게 좋은 습관과 인성을 남겨 주어 세상에 의미와 가치를 이바지할 수 있는 좋은 어른을 기를 줄 아는 부자일지 모를 테니까... 한 사람을 제대 로 이루는 것이야말로 큰 '부'의 씨앗이라 믿는 나는, 이제 엄마로서의 '부'를 이루는 중이다.한글이 자랑스럽습니다.
10년 후와 20년 후를 생각한다. 그때 이 글을 읽고 나는 미소 짓고 있기를. 그리고 이후의 '후기'를 글로 써내고 있기를. 아이들에게 노트를 건네며 꼭 앉고 웃는, 손주들을 예뻐하고 뭐든 자식들에게 받으려 하기 이전에 먼저 끝 까지 줄 수 있는 부모로 남고, 우아하고 강단 있는, 그때까지도 웃는 모습이 예쁜 할머니가 되어 있기를...
돈이 아무리 많아봤자 말미에 가짜 마음으로 대하는 인간만 남고 진짜 사랑이 없는 사람만 남으면 그게 부자일까 싶다
돈이란 놈은 돌고 도는 거다. 돈이란 말도 그래서 만들어졌다. ‘돈’의 어원에 대해 항간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속설이 바로 이 ‘돌고 도는’ 설이다.
근래 어느 대학의 권위있는 경제학교수의 연구결과로는 칼 도(刀)자에서 돈이란 말이 나왔다고 한다. 중국의 화폐경제 초기에 쓰인 게 바로 칼모양을 축소해 만들고 그 손잡이 끝부분에 구멍뚫은 도화(刀貨)였다. 괭이나 쟁기 모양을 본뜬 포화(布貨), 고기모양의 쇠돈 어화(魚貨)도 있었지만 도화가 가장 널리 쓰였다고 한다.
원래 화폐의 기원이 물품화폐였고, 그 중에서도 그 사회에서 가장 중요시되던 물건이 금속으로 만들어져 돈으로 쓰이는 것은 중국만이 아니라 세계적 현상이다. 도화나 포화는 고조선의 유적지에서도 발견된다. 특히 도화인 명도전(明刀錢)은 옛 고조선의 영역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바로는 20여 개지역이 되는데 많은 경우는 5,000여 개씩 발견되는 곳도 있다. 고조선시대부터 이미 중국과의 교역이 있었기에 중국도화가 들어와 일부 상류층의 유통수단으로, 재화의 축장수단으로 쓰였을 것은 당연하다. 그 뒤 돈모양이 요즘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엽전형태로 발전했지만, 도화의 ‘도(刀)’에서 나온 ‘돈’이란 이름은 그대로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이 설은 나름대로 학문적 근거도 갖추고 있어 일부 언론에서는 정설인 것으로 알고 그대로 쓰고 있다. 그런데 이 설은 화폐발달의 보편성에 비추어 너무 특수성을 강조한 것이다. 원래 화폐 명칭의 기원은 칭량(稱量)단위에서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영국의 파운드는 중량을 재는 단위이고, 영어의 달라는 유태인들의 화폐단위 달란트에서 나온 말인데 달란트 역시 중량단위이다. 따라서 우리의 ‘돈’도 무게를 재는 단위인 ‘돈’에서 나온 말로 보는 것이 ‘도(刀)’가 ‘돈’이 되었다는 것보다는 학문적으로도 훨씬 자연스럽다. 전근대의 화폐는 지금과 같은 명목가치만 있고 실질가치가 없는 지폐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금·은·동·철과 같은 금속화폐거나 물품화폐여서 무게가 바로 돈의 값어치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돈의 사회적 의미에 대한 학설은 학자마다 각양각색인데, 최근 프랑스의 어느 경제학자는 사회적 폭력의 산물이라고 한다. 갖가지 상품이 시장에서 대립하는 상황에서 각상품과 상품의 소유자는 폭력적으로 충돌하게 되고 이것을 화해시키는 것이 돈이라는 것이다. 폭력과 화해의 양면성이 돈에 내포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돈을 둘러싼 인간의 사회적 충돌을 상기하면 그럴 듯해보이기도 한다.
돈을 가지고 사회의 발전단계와 종교적 상관관계를 설명하는 학설도 있다. 서양중세봉건시대의 종교는 카톨릭이다. 카톨릭은 예수만이 아니라 성모 마리아나 그 밖의 성자 등 존경할 대상이 많다. 이것은 봉건사회의 교환수단이 많았던 것과도 일치한다고 한다. 서양중세에는 화폐만이 교환수단이 된 것이 아니라 많은 물품화폐도 교환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근대 자본주의사회에 들어오면서 종교개혁을 하게 되고 개신교가 자본주의사회의 세력이 가장 큰 종교가 된다.
자본주의의 교환수단은 기왕의 물품화폐가 폐기되고 ‘오직 돈’인데, 개신교의 신앙의 대상이 ‘오직 예수’인 것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결국 개신교는 어느 종교보다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종교라는 이야기가 된다. 신앙을 돈과 그대로 연결시키는 것은 돈과는 관계가 없고자 하는 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기겁할 노릇이지만, 종교 역시 사회적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는 역사적 진실에 비추어 보면 구태여 외면할 만큼 잘못된 이야기도 아니다.
문헌에 나타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돈은 기자조선의 자모전(子母錢; BC.957)이라한다. 기원전 2세기 경 마한의 동전, 진한의 철전, 동옥저의 금은무문전(無文錢)등도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찾을 수 없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돈은 고조선의 일화전(一化錢)· 명화전(明化錢)이다. 둘다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뚫린 둥근 돈으로 한면에 ‘일화’, ‘명화’라고 새겨지고 직경이 1.8-2cm밖에 안되는 작은 크기다. 옛고조선지역에서 일어난 고구려도 이 화폐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음은 유물로서도 확인된다.
백제의 무녕왕능이나 몇개의 무덤에서는 벽면을 온통 돈무늬로 된 벽돌로 둘러 쌓아 놓았다. 백제의 왕능은 벽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불교사상의 영향으로 연꽃무늬의 벽돌이 가장 많지만 돈무늬 벽돌로만 장식한 것도 적지 않다. 돈 자체가 종교적 양식으로까지 승화되던 백제의 상품화폐경제 수준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신라의 경우도 화폐사용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이 남아 있고, 향가로 유명한 월명사는 죽은 누이를 위해 저승갈 노자돈으로 종이돈을 사르다가 돈이 바람에 날아갔다는 기록도 있다.
통일신라 말기부터 대외교역과 국내의 상품유통이 활발해지면서 고려때 들면 화폐로 유통되던 금은이 축재의 수단이 되어 절간의 금부처도 제대로 남아나지 못할 정도였다. 농민은 후삼국이래 각지방 호족세력의 각축으로 말미암은 불안한 사회 상황에서 금은이나 금속화폐보다는 당장 생활에 사용할 수 있는 물품화폐를 선호하게 되어 쌀이나 베가 중요한 교환의 척도가 되었다.
고려정권이 안정되면서부터는 금속화폐의 주조도 많았다. 은으로 고려의 영역을 본따 만든 은병도 있었지만 워낙 교환가치가 높아 지배계급 간의 뇌물로나 사용되었고 민간에서 실제로 쓰이는 일은 드물었다. 지폐인 저화도 만들었으나 농민이 저화에 대한 국가적 담보를 믿지 않아 저화유통 자체도 실패로 돌아갔다.
이처럼 많은 화폐사용의 시도가 있었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가장 민간에서 교환의 수단으로 많이 쓰던 화폐는 포화(布貨)였다. 이것은 앞서 예를 들은 농기구를 본따 만든 중국고대의 포화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베 포(布)였다. 이 포화도 고려말기 문익점이 목화를 들여온 이후는 무명이 주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포화를 국가적 법정화폐로 규정하기까지해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도 실려 있다.
조선은 건국초기에 조선통보와 같은 동전도 만들었지만 고려의 저화를 이어 종이돈도 발행했다. 동전같은 금속을 투자하지 않고서도 종이에 가액만 적으면 되는 지폐가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거의 경비가 들지 않는 종이돈 발행 그 자체가 재정을 부풀리고 자신의 호주머니도 늘리는 것이었다.
이 돈은 국가가 강제적으로 사용하게 했지만 실제 사용은 제대로 되지 못하고 서울에서나 일부 쓰일 뿐 지방에서는 여전히 포화를 썼다. 저화는 사방 1자나 되는 크면서도 질이 낮은 종이로 만들어져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는 과정에서 쉽게 닳아 떨어졌고 닳아진 정도에 따라 그 가치가 낮아졌기에 일반 백성은 그 사용을 극력 기피했다. 게다가 당시의 사회는 농업을 중심으로한 자급 경제가 일반적이어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아무런 실질가치가 없는 이 종이돈은 농민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할 도리밖에 없었다. 그래서 저화의 통용을 폐지할 즈음에는 저화를 발행하던 사섬서에 쌓인 양이 200만 4,000여 장에 달했다.
임진왜란은 은화를 사용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중국은 은화의 사용이 많았고 병사의 급료도 이것으로 지급했다. 1600년 당시 조선에 주둔하던 명나라 군대 3,000명의 식량, 부식비만해도 한달이면 은화 12만냥이 요구되었다. 우리 쪽에서도 이를 부담하지만 중국에서도 은화를 들여오고 있어 조선사회 내부에 상당량의 은화가 흘러들어 왔던 것이다. 또 한 기록에는 전쟁이 소강상태에서 상인들이 왜병 진지에 물품을 조달하고 은을 받고 이를 다시 중국의 진지에 넘기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원래 조선정부는 은화는 사용금지토록 했지만 사정이 이렇게 되니 허용할 수밖에 없었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세기에는 은화가 널리 유통되었다.
동전도 몇 차례의 발행시도끝에 1678년부터 상평통보를 발행했다. 이후 우리나라의 동전은 이 돈이 금속화폐로는 가장 많이 쓰였다. 흔히 엽전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돈을 가리킨다. 이 돈은 계속 발행할 금속의 수요가 모자라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는 발전하는 경제생활에 맞추어 화폐를 발행하지 못함으로써 일종의 디플레이션현상인 ‘전황(錢慌)’현상이 나타나고, 화폐가 축재의 수단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개항이후에는 개화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재정의 확보가 필요했고 그 결과물이 1883년부터 만들어진 당오전이다. 이 동전은 명목가치는 상평통보의 5배이지만 실질가치는 거의 같은 악화여서 물가만 올리고 사회적 불안을 가져왔다. 게다가 이 돈은 평안도나 함경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등지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서울을 중심으로한 일부지역에서만 사용되어 한 나라안에 사용되는 화폐가 지역에 따라 다른 현상까지 보였다. 이 돈의 사용이 폐기된 이후에는 백동화란 악화를 만들기도 했지만 그 현상은 당오전과 다를바 없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일본화폐의 신용이 높아 일본엔화가 교환에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전통적 화폐도 일제가 나라를 먹으면서부터는 폐지되고 일본화폐로 대치되었다.
해방이후 화폐개혁의 과정까지 겪으면서 많은 돈이 나왔고, 요즘은 대학생도 신용카드 몇개를 가지고 다닐 만큼 돈의 형태에 대한 개념도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돈에 대한 물신적(物神的) 신앙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돈이 말을 하는 현대사회에서는 갈수록 ‘오직 돈’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깊어만 갈 것이다. 그리고 그 신앙심의 깊이 만큼 우리의 인간생활도 메말라 간다. 몇년전 유산상속을 노려 부모를 살해한 오렌지족 청년은 그 신앙심의 희생양일 뿐이다. 👍
오늘도 화이팅하고 좋은하루되세요🥰!